
시 주문서(注文書)_안현근
시 1 설명하지 마라 보여 달라 서술하지 마라 침묵하라 남이 했던 말은 사용하지 마라 남이 다 아는 말은 하지 마라 인용하지 마라 남이 알아듣게 말하라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은 하지 마라 말도 안 되는 말을 만들지 마라 신세타령하지 마라 가르치지 마라 시 2 짧게 써라 깊게 써라 얕게 쓰지 마라 천하게 쓰지 마라 중언부언하지 마라 직접 말하지 마라 쉬운 말로 써라 맛있는 단어를 써라 일반적이고 보편성 있게 써라 고금동서에 통용되게 써라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써라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써라 진리를 담아서 써라 깨닫게 써라 마음이 들키지 않게 써라 비밀을 남겨 놓아라 여지를 남겨 놓아라 독자가 완성하게 써라 시 3 한칼에 베어라 한 줄에서 의미를 알게 하라 시선을 떼지 않게 하라 버릴 것 없게 써라 한줄 한줄 아름답게 써라 추상명사는 쓰지 마라 시 4 언어를 심하게 비벼 꼬지 마라 머리 아프게 하지 마라 짜증 나게 하지 마라 문장이나 문법에 걸려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지 마라 멈추거나 포기하게 하지 마라 비판, 평론, 심사, 상(賞)에 신경 쓰지 마라 시 5 이해가 쉬워야 하고 꾸밈이 없어야 하고 기교가 적어야 하고 억지가 없어야 하고 진실해야 한다 읽는 이에게 공명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공명이란 울림, 동감, 기쁨, 분노, 눈물, 깨달음, 아름다움 등이다 운율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압축적이어야 하고 독창적이어야 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고 여러 번 음미할 만해야 한다 단 한 번 음미하고도 짧은 한 구절 정도는 영원히 기억에 남아야 한다 |